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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그 구차한 변명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은 뭘 말하는 것인가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철학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이다. 쉽게 퉁쳐서 말하자면 ‘악의 평범성’이란  ‘누구나 생각 없이 주어진 시스템에 충실히 임하며 그 시스템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도덕적 악함이 없이도 악한 행동을 결과적으로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한나 아렌트라는 기자 이자 이론가? 가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시절 유대인 학살에 공을 세운 전범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했고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은 오늘날 악함이라는 것에 대한 섣부른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이러한 악의 평범성 지적은 우리에게 악이란 무엇이고 도덕적 행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불러일으켜준 고마운 지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무지함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라 하겠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차근 차근 아이히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아이히만 재판

유대인을 학살한 극악무도한 악마 ‘아이히만’을 보다.

1961년 12월 이스라엘 재판정에 한 남성이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반쯤 벗겨진 머리에 뿔 테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그는 누가 봐도 전혀 악의가 없을 것 같은 그냥 그저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무려 15개, 한 두 명도 아닌 600만 유대인의 살인이란 죄목으로 이스라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 그는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당시 자신의 나라 독일의 나치 친위대 대령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을 했다. 그의 주 업무는 직접적인 살인이 아닌 수송이었다. 하지만 그 수송을 통해 결과적으로 나치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분류하고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이 패망한 후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숨어 살았다. 그는 다시 성실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어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며 장장 15년이나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이스라엘 정보 기관인 모사드가 그를 찾아냈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재판정에 서게 된 것이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묻는다 ‘악이란 무엇인가?’

아이히만은 너무도 확실한 나치 정권의 죄를 지었고 증인도 넘쳐났다. 그의 죄는, 그의 최후는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날의 재판은 이스라엘 국민에게 그리고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기억을 하며 그것을 끝까지 찾아가 단죄할 것이란 메시지와 함께 학살을 자행한 나치에 대한 죄를 공개적으로 묻고자 함이었다. 더불어 TV에 생방송을 하는 것은 악마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그렇게 재판은 흘러갔고 재판장은 그에게 최후 변론을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아이히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요. 그러니 나는 무죄요. 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나 연민 등 사사로운 감정이나 판단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오. 그저 국가가 정한 대로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당시에 보편적인 기준에 충실했던 것뿐이오”

그렇다 아이히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라면 어쩌겠느냐? 내가 과연 정말 악한 사람이냐? 너희들도 지금 국가에 충성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표정으로 거기 서있지 않느냐? 그 때 당시의 내 나라 내 조국에 국민으로서 나는 충실했을 뿐이다. 국가가 잘못 판단했다면 국가에게 살인죄를 물어라 개인인 나에게 묻지 말고...

나는 죄가 없다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의 도덕성에 대한 발상의 전환

사실 아이히만의 이러한 물음은 그 당시 .시련을 겪었던 이스라엘 국민들이기에 그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누구도 안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미국 주간지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으로 가있던 한나 아렌트만은 그 물음에 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악인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충실한 아버지이고 군이이었다. 또, 그는 어떤 악의도 갖지 않았으며 오히려 국가에 충실 하려는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직접적으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악행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수송에 대한 계획을 짜고 실행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일반적인 군 조직에서도 누군가는 하는 일이고 그냥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 아이히만은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녀는 그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의 죄는 ‘사유의 불능성’. 그 중에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 무능함이다”라고 말이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에 대해서 이런 3가지 설명을 덧붙인다.

‘인간의 복수성’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공간에 맞게 다양한 개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여건에 따라 인간이란 다양한 양심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도덕적인 인간도 악함을 가질 수 있다고

‘사유 불능성’

어느 사회이든 그 사회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수한 지식 즉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상식에 의존하고 따르려 하는 습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인간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마찰을 줄일 수 있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생각해야 하는 그런 피곤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과 독일인들이 잘못한 것은 그러한 특수한 상식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타인의 관점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그런 사유의 불능성에 기인한다.

‘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은 위에서 말한 사유 불능성에 의해 옳고 그름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하여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악을 매일매일 반복해서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찾아낸 전범들은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인간의 복수성에 의해 어느 면에서는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또 동시에 ‘사유 불능성’으로 인해 악한 행동을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 쇼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은 '괴변'이다.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조직에 충성하는 단순한 사람도 그 조직의 상식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이 누군 가에게는 치명적인 악한 생각과 행동이라면 그것은 죄가 성립된다. 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나 상대편을 도덕적으로 헤아리려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지적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멈춰있다. 개인적으로 한나 아렌트의 누구나 다 악한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의 기조는 동의한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에 있어 그 결과가 누군가에게 악한 행동이라면 그것은 유죄라고 하는 그 결론, 그 결론은 마지막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한 이의 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따라간다면 결론은 이렇게 나야 한다. 누구나 그가 속한 사회에 보편 타당한 상식 선에서 행동했을 때 누군 가에게는 악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며 상대적인 악이고 그렇기에 그는 상대방으로 인하여 단죄를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죄를 묻고 그를 죽이는 것은 이스라엘 국민들의 보편 타당한 상식에서 당연한 선의의 척결이란 명분하에 저지르는 또 다른 악의 평범성 이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악은 상대적인 것, 절대적인 것이 없을 수도...

우리는 절대적인 선, 보편적인 도덕성을 항상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 스스로 보편적인 도덕성에 상식을 공유해야만 안전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법이 절대적 잣대를 적용하지 않으면 법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공평함, 그 공평함이 주는 절대성을 상실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성도 마찬가지다 도덕성은 법 이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도덕성이란 것이 누구나 위반할 수 있고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버리면 사람들은 불안한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누구도 못 피해간다.

마치 말하면 안될 것 같은 성역이 된 사건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 던진 폭탄을 두고 악한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 폭탄으로 인하여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폭탄테러일 뿐이다. 앞 뒤 전후 다 걷어내고 ‘폭탄 투척’ 그 부문만 본다면 어느 쪽 말이 맞는가? 이 부분은 대한민국이나 일본 양쪽 다 전혀 뒤로 물러설 틈이 없다.

미국을 발견했다고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콜럼버스를 보자 그의 신대륙 발견을 위한 행동에 무슨 도덕적 악이 있는가? 지금의 미국 국민들은 그가 있었기에 그들이 이주해와서 지금의 미국을 건국했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반대로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결국 유럽 사람들이 신대륙에 진출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줬고 결국 원주민들은 무자비하게 학살 당하고 자신들의 땅을 빼앗겼다. 콜럼버스에게 원주민의 입장을 헤아려 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했다고 그에게 ‘사유 불능성’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그에게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악이란, 죄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해석하는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지점에서 타협을 해버린 것이다. 무엇으로 보편 타당한 절대적 도덕성을 판단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기에 사유 불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늘어놓고 그래서 아이히만은 죄인이라고 단죄한 것이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이런 생각에 분명 도달했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답을 못 찾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답을 내는 사람은 아마 없지 싶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당당히 답을 못 찾았다고 이야기했어야 했고 그럼에도 당신들이 아이히만을 단죄한다면 그것은 절대적 악에 대한 단죄가 아닌 아스라엘의 입장에서의 단죄라고 말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도덕적 잣대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그녀의 업적은 더 빛났으리라 본다. 왜 그렇게 어려운 절대적 ‘도덕과 악’에 대한 판결을 자신이 내려 했는지 아쉬울 뿐이다.

“지구에는 70억 인구가 살고 있다. 다시 말해 70억개의 도덕성과 악함이 공존한다”